[Turnaround 위기 딛고 선 기업들-11] (주) 상보
원화가치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요즘에도 디스플레이용 필름 제조업체 ㈜상보는 환헤지를 하지 않는다. 일본과 대만의 패널업체에 수출하는 물량이 꽤 되는데도 헤지를 안 하는 이유가 뭘까. 김상근 대표이사는 "겁나서"라고 답했다. 상보는 2008년 키코 계약을 이행하느라 48억원을 썼고 대규모 적자를 봤다. 다행히 지난해엔 영업이 상당 부분 정상화됐다. 매출 1030억원 17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그러곤 환헤지와는 담을 쌓았다. 요즘 상보의 효자 상품은 '복합 광학시트'다. TV 액정화면(LCD) 광원(BLU)에 사용되는 핵심 부품이다. BLU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LCD 패널의 뒷면에서 밝은 빛을 쏴주고 선명한 색상이 나오도록 해준다. 여기엔 보호시트.프리즘시트 등 여러 장의 필름이 겹겹이 들어가는데 상보는 이를 한 장의 필름으로 해결하는 기술을 LG전자와 함께 개발해냈다. 이 제품 하나로 지난해 3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미 주문이 쌓여 있어 올해 900억원의 매출을 회사는 예상한다. 특히 상보가 기대하고 있는 건 탄소나노튜브(CNT) 투명전극 필름이다. CNT는 지름이 1나노미터(10억분의 1m)로 머리카락의 10만분의 1에 불과하다. 구리보다 전기가 1000배나 잘 통하면서 강철보다 100배나 강하다. 쓰임새가 많아 '꿈의 신소재' '21세기 나노 기술의 보석'으로 불린다. 상보는 이 소재를 터치스크린 패널에 곧 적용한다.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열풍에서 나타나듯 요즘 전자기기 제품은 터치스크린이 대세다. 상보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하면 향후 5년간 1조3000억원의 수입 대체 효과가 예상된다고 한다. 현재 터치스크린에는 산화인듐주석(ITO) 필름이 사용되고 있는데 원천특허를 일본 회사가 보유하고 있어 전량 수입에 의존하거나 기술라이선스를 받아 한국에서 일부 생산하고 있다. 터치스크린 패널에 CNT 소재를 적용하는 기술은 한국전기연구원이 개발했다. 2008년 기술 개발 소식에 대기업을 포함해 20여 개 업체가 전기연구원의 기술 이전을 받겠다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전기연구원이 기술 이전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뜻밖에도 중소기업인 상보였다. 한국전기연구원 이건웅 박사(혁신소재연구센터장)는 "당시 대기업을 포함해 여러 업체가 연락해 왔지만 대표이사(CEO)가 직접 뛰어 온 회사는 상보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중간 실무자나 임원이 하는 것보다 오너가 직접 뛰어다니니 의사결정이 빠를 수 밖에 없었고 이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상보의 코팅 전문기술도 도움이 됐다. 이 박사 팀이 개발한 'CNT 투명전극 제조 기술'은 디스플레이 분야의 핵심 소재인 투명전극을 하나의 코팅액으로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코팅액을 비닐이나 플라스틱 등에 페인트 칠하듯 코팅해 투명한 얇은 막을 만들어 전기를 흐르게 하는 나노기술이다. 상보처럼 인쇄와 코팅으로 잔뼈가 굵은 기업이 제격이었다. CNT 소재가 최종 완성품이 아니라 중간부품인 만큼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 적당한 아이템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상보에 기술 이전을 하고 얼마 안 있다가 키코 사태가 터졌습니다. 한때 상보가 어렵다는 소문이 돌아 걱정도 많았지만 성공 보장이 안 되는 신규사업인데도 김 대표의 의지는 한 번도 흔들려본 적이 없었어요. 안정적인 사업군이 있는데도 계속 새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감동 받았습니다."(이건웅 박사) 염료감응 태양전지도 상보가 신수종 사업으로 꼽고 있는 제품이다. 나노 기술과 유기염료를 이용해 고도의 에너지 효율을 갖도록 개발한 차세대 태양전지다. 색을 입힌 투명한 유리가 식물의 광합성 작용처럼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꿔준다. 상보 김칠문 부장은 "햇빛이 약해도 발전효율이 높다는 게 강점"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의 원래 이름은 상보화학이었다. 2003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건물 외벽이나 자동차 유리에 많이 쓰이는 적외선.자외선 차단 필름처럼 친환경 소재도 많이 생산하고 있는데 '화학'이라는 이름 탓에 공해산업 아니냐는 오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2007년 10월 코스닥 상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사명이 또 바뀔 뻔했다. "회사 이름이 촌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코스닥에서 주목 받으려면 '○○테크' 같이 정보기술(IT) 분위기가 좀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름이 아니라 실적이 중요하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상보가 한눈팔지 않고 33년간 인쇄와 코팅 분야에만 뚝심 있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도 김 대표의 이런 고집 덕분이었다. 그랬던 그가 뒤늦게 사명 변경을 고민 중이다. 겉모습보다 실적이 중요하다는 신념이 바뀐 건 아니다. 인터넷 시대에 상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상보(자세한 소식)'처럼 다른 뜻으로 뜨는 내용이 너무 많다는 주주들의 불만을 감안해서다. 인터뷰-김상근 상보 대표…약방의 감초 같은 100년 기업으로 키울 것 "기업은 생물, 조금만 방심해도 상하고 죽어버리죠" 휘청했다 살아난 기업, 뭔가 다른 데가 있다. 추락하다 다시 솟아오른 경영인, 남다른 비결이 있다. 기술과 돈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일반화하기 어려운, 표준화할 수도 없는 뭔가가 있는 법이다. 내공이랄까, 근성이라는 것 말이다. 2008년 대형 적자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회생한 ㈜상보와 이 회사의 김상근(60·사진) 대표이사가 바로 그런 사례다. 김 대표는 그해 환헤지 상품인 키코(KIKO)에 KO 펀치를 맞았다. 한 해 매출(747억원)의 절반이 넘는 적자(441억원)를 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김 대표는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 정도로 여겼다. 30년간 사업하면서 겪었던 화재나 물난리처럼 말이다. 일단 그는 주력상품인 광학시트에 집중했다. 본업에서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필름코팅으로 쌓은 기술이 먹혀든 데다, 정보기술(IT) 경기의 훈풍도 불었다. 기술력과 잠재력, 그리고 기업의 평판을 인정한 금융회사들도 지원을 해줬다. 이어 그는 2009년 초 키코 계약을 이행하는 대신 한국씨티·SC제일·외환·국민은행 등 4개 은행에 부당이득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일부 남아 있는 키코 계약은 내년 초면 다 끝난다. 덕분에 지난해엔 영업이 상당 부분 정상화됐다. “그동안 키코를 포함해 네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엔 공장에서 불이 나기도 했고, 물난리를 겪은 적도 있습니다. 2000년 들어서는 일본 기업의 방해로 수십억원의 투자자금을 날려 부도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내공과 근성은 27세 때인 1977년 창업한 뒤부터 차곡차곡 쌓아 왔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살던 그에게 창업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재산이라고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방 두 개짜리 집이 전부였다. 그는 모친을 설득해 살림을 방 하나에 몰고 남은 방 하나는 세를 줬다. 그렇게 해서 얻은 보증금 40만원으로 무작정 세상에 뛰어들었다. 제조업을 하고 싶었지만 그 돈으로는 작은 공장도 얻을 수 없었다. 필요한 기계를 구입하기에도 모자랐다. 결국 서울 중부시장에서 창고 같은 건물 일부를 빌렸다. 기계는 할부로 들여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그가 했던 사업은 비닐에 제품 정보를 인쇄해 납품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인쇄·코팅 사업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80년대 오디오·비디오제품용 포장재 필름으로 사업을 확장해 재미를 봤다. 상보는 지금도 카세트테이프와 같은 미디어제품의 포장재 필름 분야에서 세계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새 저장매체의 등장으로 테이프가 기울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발 빠르게 윈도필름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빌딩이나 자동차 유리의 겉면에 적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필름을 붙이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 수요가 급증했다. 2000년대 들어 그의 사업본능은 디스플레이용 필름에 꽂혔다. IT의 발달로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 것이다. 전자제품은 가볍고 작고 얇아지는 추세인데, 여기엔 반드시 필름이 필요하다는 게 김 대표의 확신이었다. 또 상보는 처음부터 필름에 코팅하는 기술로 먹고살아온 기업이다 보니 3년간의 연구 끝에 2003년 디스플레이용 필름인 광학시트를 개발할 수 있었다. 김 대표의 의지와 회사의 기술력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한 우물을 파면서도 발 빠르게 다양한 물길을 찾아낸 그의 내공, 자신의 사업 설명에도 물씬 담겨 있다. “좁혀서 나누면 ‘인쇄’고, 좍 펼치면 그게 ‘코팅’ 아닙니까. 인쇄 혹은 코팅이란 사람이 본 사물과 생각하는 모든 아이디어를 결합해 재현해내는 거죠.” 그는 사장실의 목재 테이블을 가리키며 “이것조차도 인쇄”라고 했다. 인쇄의 방법이 다를 뿐이지, 나무의 느낌이 나도록 표면을 처리하는 것 자체도 코팅이라는 것이다. 김 대표는 “사업을 이렇게 정의하면 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진다”고 했다. 그가 그리는 상보의 미래는 ‘작은 거인’이자 ‘100년 기업’이다. “약방의 감초처럼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작은 거인’ 같은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또 100년 이상 가는 기업으로 키워보겠습니다.” ‘100년 기업’의 조건으로는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열정을 꼽았다. “기업은 생물하고 똑같아요. 조금만 방심해도 상하고 죽어버리죠. 끊임없이 공들여 다듬어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어요.” 서경호 기자